재독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쾰른(Köln)에서 미디어아트 공부를 마치고 베를린으로 와서 활동하고 있다. 본인의 활동 무대를 독일 베를린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일단 질문이 틀렸다. 전혀 유명하지 않다(웃음). 베를린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택해서 오게 됐다. 그 전까지 5년을 쾰른에서 살았는데 나는 영화공부를 했고 동수(남편)는 잘루이(Saarlouis)에 있는 직장을 다녔다. 베를린으로 몇 번 여행을 왔는데 마음에 들었다. 졸업 전, 후반 작업이 남았지만 이사했다. 우리 둘 다 대도시 출신인 데다 베를린은 서울보다 땅덩어리가 커서 여유롭지만 다양한 이벤트가 많아 우리 성향과 잘 맞았다. 그리고 뉴욕처럼 국제도시 느낌이 강했다. 베를린은 그냥 베를린이다. 독일이 아니라.
쾰른도 백남준(1932-2006), 요셉 보이스(1921-1986) 등 예술가들의 활동무대로 유명하다.
뒤셀도르프 쿤스트아키데미(Kunstakademie Düsseldorf)가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이 플럭서스(Fluxus) 운동(1960년대의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집단이다. 그 시초는 리투아니아계 미국 예술가 조지 마치우나스가 사용한 플럭서스라는 용어에서 유래한다. 플럭서스라는 이름은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 플럭스에서 유래했다)을 했던 곳이다. 그 옆이 바로 쾰른인데, 내가 다니던 학교가 백남준과 지크프리트 칠린스키(Siegfried Zielinski, 1951-)가 아이디어를 잡고 만든 학교이다.
한국에서부터 영화를 공부했나?
한국에서는 동양화를 전공했다(웃음). 저기 걸려 있는 영화 포스터도 내가 직접 그린 것이다.
전혀 몰랐다(웃음).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독일에 와서 미디어아트를 시작한 것인가?
나는 30대에 독일에 왔다. 한국에서 조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작가로서 2년 정도 치열하게 살아도 봤다. 그런데 예술 분야에서 보수적인 한국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홍대, 서울대 같은 학연 또는 인맥이 엄청 중요했다. 나도 그 안에 있으니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그런 혜택을 보고 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직장에서 디자인, 애니메이션, 영상 관련 일을 했다. 사업도 해봤다(웃음). 최선을 다해서 해볼 걸 해보니 한국에서 더 이상 재미가 없더라. 재미있는 일을 찾아 다른 나라로 가고 싶었다. 나는 아티스트기 때문에 어디서 살아도 상관없고 동수는 전문 분야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분야의 세계적인 논문이 어디서 많이 나왔나 알아보니 미국과 독일이었다. 둘 다 미국은 싫어하니까 유럽을 가보자고 하고 자동차로 유럽을 한 달 동안 여행했다. 그러던 중 독일이 마음에 들어서 결정하고 한국에 돌아가서 반년 정도 준비하고 다시 독일로 나왔다.
나 같은 경우 공부가 주목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공부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어도 배우고 사람도 만날 수 있는 학교가 제일 적당했다. 동수는 아헨공대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나는 영상을 기반으로 한다면 전혀 모르는 분야를 공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선택했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면서, 동료들과 팀 작업을 하면서 참 즐거웠다.
위안부, 세월호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 원래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나이 털린다 막(웃음).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가장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1989년 5월 28일 창립된 유치, 초등, 중등 교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이다)에 가입하는 바람에 학교에서 잘렸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갔는데 그 학교가 육영재단이었다. 주변의 다른 학교에는 전교조 소속의 선생님들이 있는데, 우리 학교에는 그런 선생님들이 하나도 없는 게 열이 받기 시작해서 우리끼리 독서토론회를 했다. 그리고 편집 반에서 대학에 들어간 운동권 선배들과 함께 철학 에세이, 거꾸로 읽는 세계사, 전태일 평전 등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독서토론회 이름도 “소나무” 다(웃음). 전교조 깃발 아래 교복 입고 광화문에 나가 집회도 참여했다.
대학 때 그림은 열심히 그렸나?
그 당시 홍대 동양화과가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 연합) 끝 무렵에 활동하던 시절이었는데(웃음), 그때 대한민국 걸개는 우리 과가 다 그렸다(웃음). 학교 안에서는 난을 치고, 옥상에서는 걸개를 그리다가 자고 그러던 시절이었다. 아직 매향리에도 그때 그린 벽화가 남아있고, 그때 함께 활동했던 선배들 중에 여전히 콜트콜텍, 밀양, 제주 강정에서 파견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실 나와 동수는 민언련(민주언론시민연합. 민주사회의 주권자인 시민들이 언론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인식 아래, 회원 상호 간의 단결 및 상호협력을 통해 언론 민주화와 민족의 공동체적 삶의 가치구현에 앞장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이다)에서 만났다. 2000년에 오마이뉴스가 처음 생겼을 때 민언련에 인터넷 저널리즘 분과가 생겼는데, 동수도 대학에서 편집장 출신이고 나도 고등학교 때 편집부에서 활동하면서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았는데 거기서 만난 것이다.
생각해보면 9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참 재미있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은 상아탑 역할을 했다. 과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 있었고,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까 고민도 많이 하고 그랬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하는 말은 필요는 한 것 같으니 일단 들어만 두고(웃음), 대신 나에게 많이 집중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셈이다. 그것을 베를린에 와서도 계속 이어간 것인가.
쾰른에서 지낼 때는 학교생활이 바쁘고 정말 시간이 없었다. 학기 중에는 세미나를 하고, 방학 때는 작업을 하고. 한국 이슈도 내가 적극적으로 찾지 않으면 접하기도 어려웠는데, 베를린에 와보니 수도긴 수도라 한국과 관련된 이슈, 활동들이 많이 모여 있더라. 2012년 박근혜가 당선되고 나서 국정원 대선 조작 의혹이 제기되면서 2013년 6월 베를린에서도 시국 선언과 촛불집회가 있었다. 이때 인건씨가 집회를 조직하였는데 그때 처음 만나 지금은 녹유에서 함께 하고 있다(웃음). 그러면서 2014년 4월 세월호가 터지고 5월에 한국에 들어가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만나고 돌아와 세월호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2015년 9월 김복동 할머니가 베를린에 방문해 슈피겔(Der Spiegel. 독일의 대표 언론사이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가 촬영을 하면서 할머니와 일주일 내내 같이 있게 되었는데, 그때 그분의 삶을 처음부터 자세하게 들으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관련 영상: https://youtu.be/j-o8vFQhHws).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이곳에서 한국 정치사회의 문제와 함께했다.
사실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아니라 글쟁이다. 이야기를 써서 극영화를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몇 개의 시나리오를 붙들고 있는데 이것들을 진행하지 못하고 4년을 온 거다. 지난 4년 동안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을 쓸 때면 ‘지금 내가 이걸 할 때냐?’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손에 하나도 안 잡혔다.
나는 스스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찍을 깜냥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학교 다닐 때 옵다흐로제(Obdachlose, 노숙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이 있는데, 반호프(Bahnhof, 중앙역) 뒤 그들도 약쟁이, 펑크족, 히피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도 선 긋기를 하며 살고 있다. 어느 날 빌레펠트(Bielefeld) 반호프에 노숙인들을 쫓아낸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거기로 가서 그 사람들과 일주일을 달라붙어서 지내면서 영상도 찍고 인터뷰도 했다. 계속 있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는 안내문이 붙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는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밤이 되면 위험했다. 약을 하는 사람 중에 더 이상 꽂을 구멍이 없어서 자기 성기에 주사를 꽂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여자이고 외국인이다 보니 의외로 마음을 빨리 열었다. 같은 마이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자기 삶의 이야기를 다 해주는 그들이 너무 고마웠지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 다큐멘터리에 진실성이 있는가, 일주일 내내 같이 있었지만 나는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 이 사람들과 정말 공감하고 이 사람들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담감이 내게 밀려오면서 다큐멘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이런 부채감이 싫어 다시는 안 하려고 했다.
정옥희 감독이 만든 세월(SEWOL, 2016) 영화의 촬영을 맡았지 않나?
옥희씨가 이 영화를 너무 하고 싶어 했고, 기술적으로 아는 바가 없으니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5월이었고, 초창기라 유가족들이 힘들었을 텐데 우리가 외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카메라 앞에 앉으시더라. 마음도 빨리 열어주시고. 그분들을 카메라 앞에 앉히고 찍는 내내 후회를 많이 했다. 그때 많이 했던 말이 “잊지 않겠다” 였다. 그러고 돌아와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베를린 행동’에서 진심을 다해 열심히 활동했다. 사람들이 내게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하느냐고 하는데, 그때 유가족들을 만난 책임감과 부채감이 있었고, 이것을 털어내려고 열심히 했던 것도 있다. 많이 버겁기도 했지만 좋은 베를린 행동 맴버들 때문에 행복하고 많이 배운다.
공동작업을 하는 예술 활동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고, 이것들을 어떻게 극복해가는 편인가?
시나리오 작업은 나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고, 그다음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든 작업이다. 프로덕션(Production) 작업은 완전히 노동이다. 스텝을 꾸리고 이들과 엄청난 체력을 소모해가며 하는 중노동이다. 후반 작업까지 끈기 있게 에너지를 놓치지 않고 가줘야 한다. 영화를 하면서 느낀 것은 내가 30년 동안 했던 것들을 여기에 모두 써야 하는 것이다. 그게 재밌으면서도 집중력을 끝까지 요하는 일이라 어려운 것 같다. 영화감독은 항상 제로베이스다. 노하우와 경력이 쌓이면 이것의 가치들이 인정되어 출발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끝나면 그다음 작품은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각본도 쓰고 촬영도 한다. 각본 쓰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일단 뮤즈가 생기면 아무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 졸업작품이었던 “Magic Zipper(2013)”라는 영화는 우정에 관한 극영화였는데,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알렉스라는 한 브라질 친구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알렉스는 흑인으로 어렸을 때 히스패닉이 많이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렉스에게 선생님이 와서 “알렉스 괜찮아. 네가 샤워할 때 네 몸을 구석구석 잘 보면 지퍼가 있는데, 그걸 열면 너랑 게네랑 똑같아”라고 했었단다. 너무 말도 안 되고 공포스러운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죽 써 내려갔다. 내가 뭘 창작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주변을 보게 되면 이것을 자극하는 것들이 널려 있다. 이것들을 만날 때 누구나 글은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주 눈에 밟히는 대상 또는 상황이 있는가?
알렉스는 다수인 히스패닉들 사이에서 흑인으로 인종차별을 받은 사람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건들었을 때 분노하게 되고 빨리 반응하는 편인 것 같다. 소수자라고 할까, 마이너 감성일 것 같다. 아직 내가 동성애 쪽은 잘 모르지만, 독일에서 외국인, 여성, 가난한 사람으로는 살아봤기 때문에 이것들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어떤 사람을 상식선에서 부당하게 건들었을 때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욕이라도 던진다든가(웃음)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빨리빨리 하는 편이고, 전략상 천천히 괴롭혀야겠다 생각하면 글이라도 쓴다(웃음).
수도권에서 살고 좋은 대학도 다녔지만, 대학 졸업 후의 활동들을 보면 주류에 가지 않으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자신을 스스로 마이너라고 생각하는가?
유치원 때 시골에 살았다. 자부심이 있다(웃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생긴 것 같다. 사실 독일에서 이곳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더 많이 느꼈다.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 친구 엘렌과의 예는 내가 독일 친구들이랑 지내면서 충격을 받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 중의 하나인데, 내가 쾰른에서 공부하던 시절 엘렌과 같이 홍대 같은 거리에 살았었다. 맨날 늦게까지 작업하고 저녁 늦게 먹을 것을 사려면 키오스크(Kiosk, 편의점)에 가서 비싸게 사야 했는데, 어느 날 근처에 있던 대형마트에서 늦게까지 영업을 한다고 하는 안내문이 봤다. 엘렌과 내가 그것을 동시에 봤는데 나의 반응은 바로 “앗싸, 이제 늦게까지도 물건을 살 수 있어.”라는 것이었고, 엘렌은 “그 말도 맞는데, 거기서 일하는 애들은 늦게 마감하느라 클럽 가는 데 준비할 시간이 없으니 그게 좀 아쉽다.” 그러는 거다. 그때 정말 소름이 끼쳤다. 나는 나름대로 고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책도 읽고 의식적으로 진보적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결국은 소비자라는 생각을 했다. 반면 엘렌은 자기에게 집중하고 사회문제에 별로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주 평범한 친구인데, 일단 노동자들 입장에서부터 생각하는 거다. 그 친구가 태생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교육을 통해 노동자라는 계급의식을 자연스럽게 체감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차이들이 이 친구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다. 한국은 잘난 척해야지 살 수 있는 사회인데, 독일은 잘난 척 혹은 잘 사는 척을 하는 순간부터 저질 취급을 받는 사회이다. 이곳에서 잘사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못 하고, 말하고 싶고 티 내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누르며 산다(웃음). 이게 문화 선진국인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기는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 같은 것이 적다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자존심 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문화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인간의 양심의 두께가 두꺼워져서 이것이 상식이 되고, 이 양심에 집중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행복해지는 것 같다.
특히 베를린은 부자, 거지, 메인, 마이너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곳 같다. 사실 내 주변에는 마이너들이 많이 없었다. 눈에 띄지도 않고, 만날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철저하게 배제돼 있었다. 나 자신 또한 그런 감수성이 없었다.
최근에 “슐레 슐레(Schule Schule, 2017)라는 영화를 봤는데, 장애인들과 같이 공부하는 프리무스 슐레(PRIMUS SCHULE)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은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만들자까지가 아이디어라면, 여기 사람들은 장애, 비장애를 넘어 모두가 함께 다니는 학교를 만들자가 고민이다. 이 정도는 가야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영화가 끝나고 정치인, 교육자 등이 패널로 나와 관련해서 토론을 했는데, 이미 독일사람들은 이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베를린에는 이런 학교가 다른 지역보다 비율이 높다고 한다. 체감한 것도 많고 경험해본 적도 많으니 고민할 것들이 많은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한국은 아직도 아이디어의 한계가 여러 분야에 많다.
한국 녹색당에 임순례 감독이 있다면 녹유에는 임선아 감독이 있다(웃음). 유재현 당원을 비롯한 몇몇 당원과 함께 녹유의 창립멤버이다. 처음 녹색당에 함께 할 때 관심 있었던 의제, 그리고 기대는 무엇이었나?
그게 기억이 안 난다(폭소). 베를린에서 녹유 준비모임을 했었고, 2014년 12월 프랑크푸르트 창립총회 때 내가 사회도 봤다는데 기억이 없다. 영상도 만들었는데, 어쩌다가 그랬지(웃음). 녹색당을 처음 가입한 계기는 기억난다. 처음 동수랑 나랑은 민노당 당원이었다. 민노당이 진보신당으로 될 때, 당시 해외에 나와 있던 우리도 진보신당 유럽모임으로 활동했다. 그때 즈음 베를린에서 한재각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을 통해 한국에 녹색당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베를린에도 녹색당 유럽모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준비모임에 참석하게 됐는데, 그날 준비모임 때 한재각 선생님이 강의한 것도 좋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듣는 시간이 참 좋았다. 이분들의 고민 지점과 소심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나랑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래서 녹색당에 가입했고, 창립총회를 한다고 하길래 최대한 돕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녹색당에서 환경문제를 다뤘던 게 좋았다. 한국의 정당들은 여전히 국지적 문제에 집중하는 면이 많은데,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세계시민으로서 같이 고민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이제는 그것들을 앞에 내걸고 갈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녹색당이 잘할 거로 생각했다. “고양이가 좋아요”라며 당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고(웃음) 정말 멋지다. 동물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진보다. 모르더라도 함께 배워가면 된다. 녹색당이 구석구석 다양한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 참 좋다.
나도 안 그런 척하지만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똑똑한 사람들도 많고,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다.
되게 구체적이면서 신선하다. 새롭다. 이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못 해도 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웃음). 동기부여가 된다. 말하는 방식에서 옛날 운동권 사람들의 말투도 없고, 아는 척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새롭게 하는 거라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다(웃음). “이것 맞나요?” 하고 체크하며 가는 과정이 참 즐겁다(웃음).
탁월하고 감각적인 유머가 단연 최고이다. 그런 재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특별히 하는 노력은?
내가 진짜 그런가(웃음)? 참 기쁘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내 인생에서 유머가 제일 중요하다. 의미와 재미가 동시에 있는 만남을 사랑한다. 인간관계에서 의미만 있거나 재미만 있으면 집에 돌아갈 때 되게 헛헛하다. 어렸을 때 나는 뭘 해도 항상 정신이 없고 잘 모르면서 잘난 척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러면서 맨날 돌아서서 후회하고 그랬다.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돌아서서 이불킥 하는 일은 줄이자고 항상 노력한다. 어떤 때는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특히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는 조심하는 편이다. 이 말이 꼭 필요한 이야기인가, 소용이 있는가, 잘난 척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몇 개의 필터링이 있다(웃음).
(녹색당원으로서든 영화감독으로서든) 앞으로 하고 싶은 활동이나 새로 구상하는 작품이 있는가?
시나리오! 제발 좀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싶다(웃음). 완성해서 남의 돈 뺏어서 촬영하고 싶다. 요즘도 한 달에 두세 번 몰래 인터넷도 안되는 곳에 가서 밀린 작업들을 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 내 영화에 동화책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동화책을 찾아 이것도 만들어야 한다. 요즘 그리고 싶은 주제가 생겨서 그림도 그리고 싶다. 내가… 할 수 있을까(웃음)?
임선아에게 녹색이란?
라디오 스타도 아니고(웃음). 녹색은 자유인 것 같다. 자유를 색깔로 표현한다면 녹색인 것 같다. 자유라 하면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거기로 들어가는 문의 색깔이 있다면 그게 녹색일 것 같다. 출발. 그것을 열고 들어가야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자유를 향한 출발의 문이 바로 녹색인 거다.
정말 아름다운 정의이다.
베를리너들이 하는 이야기 있지 않은가. "프라이하이트 깁트 에스 니히트 움존스트(Freiheit gibt es nicht umsonst)".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해야 하고 그 과정이 어렵고 무겁지만, 이 무거운 초록색 문을 열고 나면 길이 보일 것 같다.
*인터뷰일자: 2017년 10월 21일 오후 6시
*인터뷰어 및 정리: 손어진 당원 (베를린)
*똑똑똑, 녹유의 사정으로 제 8호에 실려야할 인터뷰가 녹유 홈페이지를 통해 발행되었습니다. 바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선아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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