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인터뷰 임혜지 당원 (제18호)

2021.03.30 11:39

똑녹유 조회 수:601

똑똑똑, 녹유 당원 인터뷰


내가 원하는 세상은 내가 화끈하게 밀어주지 않으면 오지 않아요 

뮌헨에 사는 건축가•환경운동가•유치원 원장 임혜지 당원을 만나다

 

혜지 님을 책이나 블로그를 통해(빨간치마네집: http://hanamana.de/)먼저 알고 있는 한국 유학생, 교민들이 많다. 독일에 50년 가까이 살면서 그동안 4대강 반대 사업, 번역연대, 정토회, 뮌헨 세월호 모임, 한국 녹색당 유럽 모임 등 한국과 관련된 많은 활동을 해오고 있다. 처음에 어떻게 독일에 오시게 되셨나?

독일에는 1974년에 왔으니 벌써 47년이나 되었다.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오셔서 본(Bonn)에 있다가, 거기서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아비투어(Abitur, 대학 입학 종합 자격시험) 이후에, 카를스루에(Karlsruhe)로 가서 건축을 공부했다.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아이들 낳고 살다가, 남편 직장 때문에 1999년에 뮌헨(München)으로 이사 왔다. 사실 카를스루에는 독일 사람, 한국 사람 할 것 없이 아는 사람이 참 많았다. 독일 친구 하나가 언젠가 내게 너랑 같이 다니면 너는 길에서 5분마다 인사를 한다고 하더라(웃음). 그런데 뮌헨에 오니까 여기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내게 참 좋은 경험이었는데, 뮌헨에 와서 처음으로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동안 대학 졸업하고, 일하고, 아이들 낳고 논문 쓰는 것을 질질 끌었는데, 새로운 도시에 와서 아무도 안 만나고 완전히 내 일에만 몰두해서 논문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다 조금씩 뮌헨에서도 아는 사람들이 늘어간 거다. 


혜지 님이 독일에 처음 왔었던 때는 지금보다 한국과 독일이 더 다른 국가였을 것 같다. 독일 생활을 어떻게 적응해 갈 수 있었나? 

정말 너무 달랐다. 길을 걸어갈 때도 차 방향과 같이 좌측통행을 해야 하는지 우측통행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때 누가 독일에 온 지 10년이 됐다고 했을 때 ‘어떻게 여기서 10년이나 안 죽고 살 수 있지?’ 생각했다(웃음). 나는 당연히 조금만 있다가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하에서 외교관 자녀들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녀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대부분 외교관 자녀들은 외국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같은 곳에 특채로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또한 12학년까지 다니고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례적으로 아비 투어를 보고 이곳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지 고등학교 생활은 굉장히 힘들고 재미없었는데,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하루하루가 행복한 생각이 들었다. 독일에 온지 3~4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독일말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웃음). 어려서였을까, 독일 생활에 적응하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10대와 20대 시절, 독일에 살면서 스스로에 대해 어떤 정체화의 과정을 겪었는지?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론 어떤 때는 내가 한국인이지만 독일에 오래 살면서 한국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고 한국말을 안 쓰다 보면 한국어를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한국 사람이지만 독일 사람들과 더 말이 잘 통한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어쩌다 한국에 가면 당장 비행기 안에서 문화 충격을 받는데, 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안 물어봐야 하는 것까지 물을 때 그렇다. 비행기에 내려서 입국 용지를 기록할 때도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막 본다. 웃기는 것은 어느 순간에 나도 그 아저씨 용지를 보고 모르시는 것 같으면 가르쳐 드린다(웃음). 독일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한국인들끼리는 그럴 수 있지 않은가. 한국에 오면 나는 동화 빨리 되는 편이다. 내가 만약 독일 사람 같으면 그게 안 될 텐데 말이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소리도 지르고, 정말 한국 사람처럼 살다가 독일에 다시 올 때면 정말 독일에 오기 싫어진다(웃음). 

나는 아직 한국 국적을 가지고 살고 있다. 독일인과 결혼해서 사는 한 외국인이라도 독일 사람과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바꿀 이유가 없었다. 예전에는 한국 여권으로 가지 못하는 나라들이 많았다. 여행 다니기 불편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독일 국적을 받은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나는 남편과 자전거 타고 국내 여행을 다니면 다녔지, 공산국가로 여행을 다닌다거나 하지 않아서 불편한 게 없었다. 사실 이론적으로 봤을 때도 한 가정에 국적이 2개가 있는 것이 이익인 것 같다. 전쟁이라도 나면 이쪽 나라에도 갈 수 있고, 저쪽 나라에도 갈 수 있지 않은가(웃음). 독일 국적이 없다고 해서 독일이라는 사회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이고 나라이기 때문에 열심히 가꿔야 한다는 마음은 똑같다. 한국은 나와 인연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똑같이 중요하다. 그냥 나에게는 나라가 두 개라고 생각한다. 

(잘 믿을 것 같지 않아서 말하지 않는) 국적을 바꾸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나는 박정희가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손뼉 쳐서 세 번이나 대통령으로 뽑히는 꼴을 보면서 자란 세대다. 고등학교 때였는데 그게 너무 싫고 거기에 대한 반항심이 엄청나게 컸다. 그래서 기필코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아서 독재를 불식시키는 기적을 보고 싶다는 염원이 항상 있었다. 투표를 통해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국가를 세우리라 그런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결국 맛보았나? 

그동안은 열심히 투표하러 다녔는데, 이명박 뽑히고 박근혜가 뽑히는 꼴을 봤다. 문재인 대통령 때는 미안하지만 나는 문 대통령을 뽑지 않았다. 더 내 마음에 더 드는 정책을 말하는 다른 후보를 뽑았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잘하셔서 기쁘긴 하지만, 뽑을 때 갈등을 많이 했다. 정권과 정책이 바뀌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실리적인 선택을 하느냐 아니면 정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느냐 고민하다가 결국 내 마음에 드는 후보를 뽑았다. 사람이 계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내가 원하는 이상을 키울 수가 없다. 나와 내 남편은 국적이 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편이 투표하러 갈 때는 남편이 내 의견을 반영해서 투표하고, 내가 한국 쪽 투표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남편과 상의를 해서 한다. 남편은 항상 실리를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고, 나는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하고 항상 미진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편이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화끈하게 밀어줘야 이쪽 방향도 물을 먹고 자랄 수 있다. 남편은 지금껏 항상 녹색당에 투표했는데, 초창기 녹색당을 밀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었다. 그때 내가 남편을 설득해서 녹색당을 끝까지 찍게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녹색당이 원내에 들어갔고, 이후에 정권까지 잡고 정말 큰 일을 많이 했다. 그런 믿음이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은 내가 화끈하게 밀어주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남편 분의 선거와 내가 내가 참여하는 선거에 대해 함께 상의하고 결정한다는 말이 내게 신선하다. 나에게는 항상 선택의 문제였다. 국적을 포기하거나 취득하는 일, 투표를 하거나 못하게 되거나. 그런데 혜지님 말을 들으면서 이것은 무엇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상의하며 결정할 수 있는 문제구나를 처음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이 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독일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당한 경험 같은 것은 없나? 

많이 받았을 것이다. 차별을 받았을 것도 같은데 그것을 내가 몰랐거나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서 떨어졌다면 실력이 없어서 떨어졌는지 외국인이라서 떨어뜨렸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으니 잘 모르고,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국적에 대해서는 나는 별로 미련이나 아쉬움이 없는데, 남편은 조금 섭섭해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남편은 나와 손잡고 투표하러 가는 로망이 늘 있다. 독일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은 선거 날 아주 깨끗한 옷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예쁘게 차려입고 선거를 하러 간다. 남편은 그게 부럽다고 하더라(웃음). 

솔직히 말하면 독일에 오래 살면서 독일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외국인도 여기서 세금을 내고 사는 한 선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독일 국적으로 바꾸고 여기에서 선거를 참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재외국민 투표를 생각해보면, 내가 한국에 곧 돌아갈 것이면 이곳에서 재외국민 투표를 해도 괜찮지만, 여기 사는 사람으로서 한국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게 사실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전쟁이 나면 나는 여기 있어서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전쟁이 나게 투표해놓고 나는 안 다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자신이 사는 곳에 국적을 취득해서 여기서 선거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국적을 바꾸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다. 코로나 상황에서 어떤 국적이냐에 따라서 비행기에 태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일이 있었다. 코로나와 같은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갑작스러운 일이고, 나와 남편이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는 독일에 못 오고, 남편만 독일로 보내지는 일이 있을 수 있겠구나 깨닫게 됐다. 만약 그렇게 되어 내가 한국에 남겨졌을 때 어떨까. 사실 한국은 이제 내 집이 아니다. 거기에 내 친척 형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내 집은 엄연히 남편과 아이들이 살고 있고 내 침대가 있는 독일이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내가 사는 곳에서 내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도록 국적을 바꾸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남편에게 말하니 되게 좋아하더라. 지금은 또 흐지부지하고 있는데, 남편이 언제 할 거냐고 자꾸 묻는다(웃음). 

 

평소에는 내가 정치적인 인간인가 느끼지 못하다가 선거 때 확실히 더 느낀다. 독일에 살면서 여기 사람들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주변을 조직하고, 시위하고, 적극적으로 정당에 요구하고, 투표해서 정권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혜지 님이 이곳에 사시면서 바꾸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는지, 정치적으로 조직해서 변화시켰던 경험이 있으신지? 

정치적으로 조직해서 변화시켰던 경험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 일이다. 당시 유치원 선생님이 자꾸 병가를 내서 아이들이 희생을 많이 당하고 있었는데, 학부모 중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그때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선생님을 그만두게 하고 다른 사람을 들였다. 그때 사람들이 네가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다고 다 놀라 했다.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한 적은 없었는데, 아이들 키우고 일을 할 때는 사느라고 바쁘고 정신이었었고, 할 수 있을 만 했을 때는 4대 강 반대 운동을 하느라고 한국 쪽으로 많이 기울었었다. 한국어로 번역하고 글쓰기에 집중하느라 이곳 생활에 소홀한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상에서 항상 소소하게 정치적이지 않나. 예를 들어 ALDI 유기농 제품에 플라스틱 포장지 좀 없애 달라고 편지 한 장 쓰는 게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가? 길을 가다가 멈춰서 서명에 응하는 것, 삶으로 주변에 보여주는 것, 이 모든 일들 정치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어떤 것을 바꾸기 위해 일상에서 실천도 하고, 정치적인 의견을 모으고, 전달하고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는 쪽으로 바뀌지 않을 때 답답할 때가 많다. 

빨리 안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이 섭리 같다.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고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안 하느냐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일은 그것을 바꿔야 하므로 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부끄러우니까 하는 거다. 한다는 그 자체가 옳기 때문에. 결과는 세상 이치에 따라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애를 태운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력을 하고 안하고는 나에게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나에게 4대 강에 관해서 그렇게 몇 년을 받쳤지만, 결과적으로 된 것이 없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는 하나도 허무하지 않고 도리어 굉장히 자랑스럽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4~5년 동안 4대강 반대 운동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그때 나는 사람 구실을 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보고만 있었다면 굉장히 창피했을 것 같다. 4대강에 대해서는 내가 부끄러움이 없다. 결국 그런 마음이 아닐까? 


대학에 다니실 때부터 독일 녹색당 지지자였고 알고 있다. 녹색당의 가치에 특별히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나? 

나는 68세대 후신에 대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당시 히피 문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기존 것들에 대한 반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대학을 다녔다. 처음으로 FKK 문화가 유럽에 들어왔을 때였는데, 나 또한 초창기 멤버로 거부감 없이 이런 문화를 즐기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당시 독일 녹색당은 환경뿐만 아니라 이런 젊은이들의 이상과 라이프 스타일도 많이 반영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녹색당이 내세운 ‘기름값을 리터당 5마르크로 올려야 한다’는 공약도 굉장히 신선했고, 내게 매력적인 정당으로 다가왔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라면서 자연보호, 환경 등에 대해서 자연스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의 천호동, 길동, 성동구 지역이 시골 지역일 때 살았는데 어린 시절 참 행복했다. 사실 내가 환경주의자가 된 또 다른 이유는 지금 남편이 된 남자친구의 영향도 컸다. 내 남편은 굉장히 적극적인, 편파적인, 융통성 없는 환경주의자다(웃음). 환경을 위해 비행기도 안 타고, 차도 운전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다 보니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다. 20대 중반에 사귀기 시작해서 지금 우리 나이가 예순을 넘었으니 되게 오래됐다(웃음). 


한국에서 녹색당이 생길 때 초창기에 함께 하셨다고도 알고 있다. 한국에서도 녹색당이 창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감이 어떠셨나? 

당연히 반가웠다. 한국에서 녹색당이 처음 생긴다고 할 때, 당시 나는 4대강 반대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전 공동운영위원장이신 하승수 변호사님이 녹색당을 만들려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 또한 뭐라도 하고 싶었다. 독일 녹색당이 사민당과 정권을 잡았을 때(1998-2005) 부총리와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녹색당 출신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에게 한국 녹색당 창당 격려 편지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려고 했는데, 4대강 때문에 너무 바빠서 생각만 하고 진행을 못 했다. 그 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국 못했는데, 그것이 두고두고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사실 나는 조직 문화를 불편해하는 것도 있고, 아버지가 외교관이라 보고 자란 것도 있어서 정당에 가입하는 것도 상상을 안 해봤다. 하지만 당시 하승수 전 위원장님이 기존에 정치하는 사람들 같지 않고, 사람이 알아듣는 말을 하는 사람 같고, 그분에 대한 신뢰가 생겨서 당에 가입하게 됐다. 당시 녹색당이 굉장히 도움이 필요할 때였고, 거창한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함께 하게 됐다. 

   

현재 독일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유치원에 일하신 지 얼마 안 돼 문제점을 발견해서 해결해 가는 과정이 드라마틱했다고 들었다. 

어린이 인권에 관한 문제였다. 처음, 이 유치원에 수석 보육교사(Kinder Erzieher)가 육아휴직을 들어가면서 자리가 나서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거기에 보육 보조교사(Kinder Pfleger)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많이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룹을 담당하는 사람이었지만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힘도 별로 없었고, 학부모들도 이 보육 보조교사에 아주 만족하고 있어서 수석 보육교사가 돌아올 때까지만 잘 해주시길 바란다고만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이 유치원에서 어린이 인권이 심각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지만 아주 소소한 것부터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자율성이 무시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물을 마시고 싶어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쉬고 싶을 때 쉬어야 하는데, 시간이 되면 다 누워야 하고, 규칙이 너무 많았다.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경직되게 운영을 했는지 모르겠다. 보조교사와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조율되지 않아 내가 부모들에게 정중하게 편지를 썼다. 나는 이곳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라서 웬만하면 다 맞춰주고 싶은데, 어린이 인권에 맞지 않는 이러 이러한 부분은 내가 맞춰줄 수 없으니 너희가 결정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기존 교사들 흉을 본 것도 아니고, 그저 담담하고 담대하게 썼다. 부모들은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다고 너무 놀라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보조교사가 내게 소리 지르고 공격하는 것을 부모들이 다 보게 되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부모들이 나를 선택했다. 

내가 늦은 나이에 그 유치원에 들어갔지만, 이 유치원이 아니라도 다른 곳에서 일할 수도 있었고, 꼭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거기서 그 보조교사와 싸우겠는가. 그 사람이 미워서도 아니었고, 나는 내 일자리를 내가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는게 중요했다. 그 사람이 나가기 전까지 나에게 너무 못되게 굴었고, 아이들은 그 교사에게 길들여 져서 나를 왕따 시키고, 정말 힘들었다. 결국 부모님들이 그 보조 교사에게 석달치 월급을 다 주고 해임시켰고, 그 사이 나는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유치원 교사라는 것은 실력으로 일하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일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일을 계기로 진심은 통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 후에 또 다른 교사를 구하는게 힘들었지만 다행히 좋은 분도 구하고, 지금은 부모들이 전적으로 나를 믿고 지지하는 가운데 일하고 있다.

 

코로나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유치원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나는 온라인 시스템을 일찍 도입한 정토회 덕분에 인터넷으로 아이들 만나고 수업하는 것에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긴급돌봄으로 꼭 유치원에 나와야 하는 아이들 반, 집에 있는 아이들 반 해서 두 명의 교사가 나눠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을 진행한다. 유치원 애들이라 몸을 움직이고 상호 작용을 해야 공부가 되는데, 아이들 지목해서 말시키고 참여 시키는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잘 진행하고 있고, 어떨 때는 그만 하고 싶은데 아이들이 계속 하자고 해서 피곤하기도 하다(웃음).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알바를 하던 일들이 모두 끊기고, 고립되어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때 일 수록 서로 어려움을 나누고 서로 돕고 이 시기를 함께 이겨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최근 혜지님이 함께하는 뮌헨 세월호 모임 주도로 세월호 7주기를 맞아 ‘4.19 기억저장소’ 후원을 위해 3,700 유로가 넘는 금액을 모금해 전달한 바 있다. 이 시기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시기로 보면 지금 우리는 은퇴 들어가기 몇 전 년인데, 이때가 가장 돈이 많을 때다. 아이들은 모두 독립했고, 월급쟁이들이기 때문에 생활에 지장은 없다. 지금 들어오는 돈들을 노후 자금으로 저금해서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지금 모아놓은 돈을 까먹고 사는 거다. 그런데 최근 나와 내 남편은 지금은 우리가 노후 자금을 저금할 때가 아니라 그동한 저금한 돈을 풀어서 세상이 망하지 않도록 우리의 노후를 맡길 주변 사람들을 도울 때라고 결정했다. 광고를 하지는 않지만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돈을 조금씩 쓰고 있다. 사실 구두쇠라고 소문난 우리가 이렇게 돈을 헤프게 써본 적이 없다. 평소에 외식도 안하고, 시켜먹지도 않다가, 지금은 괜히 가까운 식당이나 빵집에 가서 우리 먹을 거보다 많이 사서 이웃에게 배달을 가기도 한다. 이렇게 사니까 견딜만 하다. 만약 나만 생각하고 살았으면 굉장히 암울했을 것 같다. 지금은 나만 생각하고 살 수록 손해가 많은 시기다. 불안한 마음만 커진다. 나에게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전체로 맞추다 보니까, 내가 생각보다 가진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타심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인 것 같다. 

 

임혜지에게 녹색이란?

녹색은 내가 아이였을 때부터 아주 좋아하던 색이다. 녹색만 봐도 눈이 시원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자연보호, 환경보호도 떠오르게 한다. 나에게는 희망 같은 메시지도 된다. 여기서 희망이라고 했을 때, 내게 희망은 인류애인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좀 덜 불공평을 겪고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인류애 말이다. 


-인터뷰 일자: 2021년 1월 22일

-인터뷰이: 임혜지 당원, 인터뷰어: 손어진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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