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언제, 어떤 계기로 녹색당원이 되었나?
녹색당이 창당하기 전부터 녹색연합이나 녹색평론과 같은 잡지는 있어왔다. 96년에 결혼해서 97년에 진이가 태어났는데, 그 무렵 녹색연합이나 앰네스티 단체 같은 곳에 후원하면서 이쪽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녹색당원이 된 것은 하승수 씨 때문이었다. 그와는 과천에서 공동육아를 하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면서 만나게 됐고, 같이 일을 하면서 친구가 됐다. 하승수 씨네 집 아이와 우리 아이가 다 그곳에서 같이 컸고, 둘이 다섯 살 때부터 오랜 친구다. 그를 중심으로 녹색당이 만들어지는 준비 과정을 자세히는 몰라도 알고 있었고, 친구가 하는 일이니까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언제 녹색당을 만들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당원이 됐다.
일찍부터 녹색연합, 환경 쪽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직관적으로 그쪽에 관심이 있었다. 사실 나는 논리나 계획이 없는 편이고 계속 도시 변두리에서 살았지 농촌에서 살아 본 적도 없지만, 젊었을 때부터 나이 들면 농촌이나 작은 마을에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관심을 갖다보니까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는 ‘도시에서 녹색삶 살기’ 같은 강의를 찾아다녔다. 그 강의를 따라가다 보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데, 그중에 녹색연합 활동가 혹은 그런 단체에 후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읽고 있는 책들이 녹색평론이고. 그렇게 녹색연합도 가입하게 된거다.
그 당시에도 그런 분들은 소수, 비주류였을 것 같은데..(웃음)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관심이 있어 찾아간 강연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라서 이런 사람들이 이 정도로 소수일 줄 정말 몰랐다. 나는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다라고 생각했다. 녹색당 사람들도 한 줌인 걸 최근에 알았다(웃음). 내 친구들이 거의 다 녹색당원이기 때문이다. 친정엄마 아빠, 동생들도 내 이야기를 듣고 큰 거부반응 없이 다 녹색당원이 되었다.
홍성으로 귀농해서 살고 있다.
우리가 홍성으로 이사한 것도 하승수 씨가 계기가 됐다. 그가 홍동(홍성군에 있는 면)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우리는 1년에 서너 번씩 홍동에 왔다 갔다 하면서 그곳 사람들도 만나고 분위기를 살폈다. 진이가 스무 살이 되어 기숙사가 있는 대학에 갈 때 즈음에 남편이 퇴직하게 됐는데, 남편이 더 이상 출퇴근을 안 해도 되니 도시에 살 이유가 없게 됐다. 그래서 진이가 독일로 가게 됐을 때 우리는 홍동으로 이사했다. 이제 3월이면 2년이 된다.
2년을 보낸 소감이 어떤가?
서울에 녹색당원이 가장 많기는 한데, 녹색당이 처음 만들어질 때 홍성을 중심으로 녹색당원을 모았다. 홍성이 우리나라 유기농업을 처음 시작했던 곳이고, 농사를 잘 짓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 녹색당원이라 참 좋다. 진이한테 그런다. 독일 삶이 힘들면 애쓰지 말고 홍동으로 오면 된다고 말이다. 여기서 먹고 놀면 돼(웃음). 홍동에 많은 녹색당원이 있고, 그중 여성 비율이 굉장히 높은데, 20대부터 50대까지 정말 다양한 여성들이 있다. 비혼 여성 녹색당원들이 할 수 있는 굉장히 다양한 일들이 있다. 기본소득의 범위가 확대되면 먹고 놀 만큼 나올 거니까 와서 편히 놀았으면 좋겠다(웃음). 홍동에 쉐어하우스 형식의 잠잘 곳도 무궁무진하다. 나만 안 하지 다들 논농사를 짓는다. 할 수 있는 모임이 많은데, 하고 싶으면 우리끼리 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홍성 공동체, 녹색 당원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삶은 어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내 나이가 이제 오십이다. 만약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삼십대를 만날 일이 없을 텐데, 홍성 녹색당과 충남 녹색당에서 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활동하는 사람들이 이십 대, 삼십 대 초중반이 많다. 물론 사십 대도 있고. 녹색 당원 중에는 농사를 짓는 나이 드신 분들도 있지만 그분들이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한다. 녹색당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젊은 사람들이다. 내가 만나서 회의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삼십 대 분들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할 수 있도록 칭찬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은) 많이 다르지 않는가?
함께 일 하면서 그렇게 다르다고는 생각 안 해봤다. 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때로는 급하고 빨리 진행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할 수만 있다면 빨리빨리 해도 되는 거지 않나?(웃음)
충남 녹색당 사이트를 보니 농민수당, 한빛 핵발전소 폐쇄, 기후위기 비상행동, 평등 행진 등 굉장히 활발하게 이슈파이팅을 하고 있더라.
충남 도청이 홍성으로 오게 되면서 우리가 사는 곳과 도청이 가까워졌다. 도청에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으니까 자주 하게 되는 거다. 멍석 깔아주니까 하게 되더라(웃음).
평범한 당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정치에 가담하고 참여하고 있다. 동기나 힘은?
녹색당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정당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하는 활동이 환경을 위하는 사회봉사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다. 나도 사실 그렇다. 정치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닌데, 상황이 그렇게 됐다. 충남에 오기 전 용인에 살았을 때, 용인 녹색당에서 운영위원과 운영위원장을 제비뽑기로 뽑았었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누구나 돌아가면서 무언가를 맡아서 할 수 있는 방식 말이다. 충남 녹색당 운영위원장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작년에 운영위원장을 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누가 할 수 있을까 이야기 나눴는데, 다들 못할 이유가 있었고 나는 딱히 못 할 이유가 없었다(웃음). 딱히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는 거다. 그럼 이번에는 임기 2년 동안 내가 하는 거고, 다음번에 또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다.
화이팅(웃음)! 지금 가장 관심 있는 이슈는 무엇인가?
총선! 바뀐 선거제도 하에서 (정당 득표율) 3%가 넘으면 4명을 국회로 보낼 수 있는 거다. 작년 상반기 6-7월까지만 해도 3%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려워도 해보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그날 결과가 안 좋게 나오더라도, 지금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다들 지금이 (3%를 넘을) 가능성이 가장 높을 때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녹색당 비례후보로 뽑힌 분들도 굉장히 열심이시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은 분들이다. 참 좋다. 곧 한국에 가면 한 달 반 또 열심히 해보련다.
결혼을 하거나 누군가와 파트너십을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 같다. 20대 은희에게 결혼이란 무엇이었으며, 파트너십이란 무엇인가?
결혼식도 하고 혼인신고도 했다. 나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우리가 백년해로를 해야겠고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겠다는 강한 마음이 없었다. 남편은 사실 그런 이야기를 잘 안 했는데, 나는 결혼 초부터 20년 넘게 ‘우리가 좋으니까 살았으니 싫어지면 따로 살수도 있다’고 말해왔다(웃음). 나이가 들면 남자들이 약해지고 더 보수적으로 된다고 하는데, 그 사람도 계속 그 말을 들으니 교육이 됐을 것이 아닌가(웃음). ‘그래, 싫으면 따로 살 수 있지’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던 게 오래 살 수 있었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우리도 같이 살지만, 각자 자는 방이 따로 있다. 남편과 내가 잠자는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남편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싶어 하고 나는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고 싶은 사람이다. 어느 정도 이 차이를 맞춰보다가 이제 각자 잠은 편안하게 자자고 합의가 되어서 그렇게 됐다. 사실 별거라고 할 수 있는데, 이혼만 안 했다 뿐이지 각자 살고 있다(일동 웃음).
각자 애인이 있는 건 아닌가(웃음)
삼십 대, 사십 대 초반이었으면 각자 애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나나 남편이나 다른 이성을 만나서 에너지를 쓸 만큼 힘이 없다(웃음). 나는 게다가 녹색당이나 다른 활동에 에너지를 쏟는 부분이 많고, 남편은 에너지가 그렇게 많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웃음). 공동체가 좋은 게 다른 이성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남편에게 잘 못 해주는 부분을 공동체 어떤 분이 또 굉장히 잘해주기도 한다. 이런 부분을 통해 적당하게 잘 조정되는 것 같다. 우리 둘이 같이 만나는 친구가 많다는 것도 참 좋은 일이다.
한국에 살면서 오랫동안 학습된 이성애자로 살았다고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성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는 일련의 정해진 루트…
나는 젊었을 때부터 딱히 남자와 살아야겠다, 여자랑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냥 좋은 사람을 계속 만났었다. 남편 말고도 다른 좋은 남자들도 많이 만났고, 여성들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좋아했던 여자들은 다 남자들과 짝을 지어 결혼해버려서 내가 먼저 같이 살아보자 말할 기회가 없어졌다. 대학 졸업 후에 직장생활 하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면 같이 살아보자고 제안해볼 수 있었을 텐데(웃음). 당시 결혼이 본인들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집안의 결정이었는데, 남편 집과 우리 집에서도 이제 결혼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고, 그 흐름에서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하게 된 거다(웃음). 싫은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 보니 결혼이 됐다(웃음). 나중에 나이가 들고 나서 내가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혼은 연애와 달라서 정말 도박 비슷한 것 같다. 모 아니면 도,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이 된다. 나는 운이 좋아서 다행히 남편이 가정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다.
출산은 여성이라고 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지만 신체적인 어려움 때문에, 사회적인 여건 때문에 출산을 못 하기도 한다. 자녀를 갖는 과정에서 망설임이나 고민은 없었나?
임신도 계획이 딱히 없었다. 몇 명을 낳겠다는 것도 없었지만 갖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결혼하고 다섯달 만에 자연스럽게 임신이 됐다. 임신 과정에서도 위험이 없었고, 뱃속에서도 순조롭게 애가 잘 컸고, 초산이었는데 진통시간도 길지 않게 5시간 만에 잘 나왔다. 물론 애 키우는 것은 남들 어려운 만큼 어려웠지만 말이다. 임신과 출산은 나에게 자아 성장의 계기가 되는 일이었다. 나는 원래부터 기가 센 사람이라서 다른 외부 어떤 자극도 나를 제어하거나 성장시킬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 친정 아빠도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정말 많은 수양을 했다. 이 모든 자연스러운 과정이 내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됐다.
진님은 공동 육아를 하는 어린이집을 다녔고, 중학교 때부터 (소위 대안학교라고 불리는) ‘이우 학교’에 다녔다.
남편도 나도 진이가 학교를 안 다녀도 된다고 생각했고, 학교를 안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학교에 가야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그게 제일 즐거운 일이니까 보낸 거다. 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됐을 때 교복을 입고, 입시를 위한 일반 학교에 보낼 것인가 고민했을 때 진이가 대안학교를 가겠다고 해서 갈등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진이는 사람 말을 잘 귀담아듣는 사람인데, 엄마의 설명을 듣고 결정했고, 원서를 써도 안될 수도 있었는데 잘 되어서 이우 학교에 가게 된거다. 사실 학교를 안 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진이는 자기표현의 욕구가 강한 사람이고, 그것을 몸으로, 글로,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람인데, 학교를 안 갔으면 그것들을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전 세계가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한국은 여러모로 여성들이 살기 어려운 시대였다.
나는 딸 셋 중 맏이였다. 딸 중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고 집 안에서는 남녀차별이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부모님에게 맞기는 제일 많이 맞았는데, 그건 큰 애라서 동생들 보기에 잘하라고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여중, 여고, 여대를 다니면서 세상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우리는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일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대학 졸업 후에 임용고시를 준비했는데, 계속 잘 안 되고 아르바이트로 임시 교사를 한 게 다였지 직장에서 느끼는 남녀차별을 경험하지 못했다. 정말 몰랐던 거다. 나중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똑같은 시대에 살았어도 이렇게 산 여성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진이가 커서 섬세해 지면서 나더러 ‘엄마는 명예 남성이다’고 했다(웃음).
진님이 팩폭을 날렸다(웃음)
진이처럼 저렇게 싸우는 애가 있어야 사회가 조금씩 달라지고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남녀가 모두 살기 좋은 사회라든지, 여성이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같다. 다만 지금 불편하고 잘못돼 있으니까 계속 싸우는 과정만 있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딸을 낳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진이에게도 늘 결혼도 해보고 아이도 낳아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이 힘들지만 결혼해보고 아니면 이혼하면 되고, 아이도 낳아보고 힘들면 방법을 찾으면 된다. 아이를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면 여러 가지로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진이가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 ‘손녀딸’을 보고 싶고, 있었으면 좋겠다(웃음)
상상하기 어려운 멋진 일인데 녹색당원 딸이 있다는 사실이 어떤가?
내가 미래를 더욱 밝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미래가 암울했으면 아이를 낳지도 않았을 거다. 녹색당원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아들보다 딸이 있어야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다.
차별적인 발언이다(웃음)
그게 경험적으로…(웃음) 미국에 한 통계 결과가 있는데, 딸을 가진 아빠와 아들을 가진 아빠의 민주당과 공화당 선호에 확연한 차이가 있더라. 딸을 가진 아빠들이 훨씬 더 민주당을 선호하는 더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딸의 미래에 관심을 가지면 엄마든 아빠든 지금 세상이 참 나쁘고 더 좋아져야 한다는 합의에 이르게 된다는 거다.
마지막 질문이다. 은희에게 녹색이란?
만약 딸에게, 미래에 관심이 없었으면, 나만 잘살고 이 세상을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환경이나 정치 같은 것에 관심 없이 오로지 나 자신에만 관심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요가나 명상만 하면서 나 자신만 수련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미래에 관심이 있으니까 녹색당원이 된 거다.
* 인터뷰이: 김은희 당원(홍성, 독일 방문 중) 인터뷰어: 손어진 당원(베를린)
* 인터뷰 날짜: 2020년 2월 18일 화요일 오전 10시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