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에센에서 살고 있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됐을 때, 두려움이나 주저함은 없었나?
처음 외국에 나가 산 것은 2009년 8월이었다. 대학 시절, 아는 언니가 자기가 다녀온 영국의 캠프힐(Camphill) 봉사 프로그램을 추천해주었다. 공동체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보는 것이 좋은 경험이고, 영어도 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찾아보니 ‘캠프힐’이라는 곳의 기원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을 피해 장애가 있는 아동들을 산속에 데리고 도망쳐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시작했다고 한다. 거기에서 발도르프(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제창한 교육 사상 및 실천으로 독일에서 시작된 대안 교육의 일종) 교육 방식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고, 현재는 정부 지원금을 받으며 운영되는 자선단체로 거듭났다고 한다. 영국에만 60여 개의 캠프가 있고, 유럽 전역에는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내가 코 워커(co-worker, 자원봉사자)로 지원했던 곳은 스코틀랜드에 소재한 학교 공동체 ‘캠프힐 블레어 드럼몬드(Camphill Blair Drummond)’였다. 11개월 동안 자원봉사를 하는 것인데, 학교 공동체에서 같이 살고 직접 요리를 하므로 주거비와 식비가 따로 들지 않았다. 내가 있었던 캠프힐은 학습장애가 있는 18세에서 30세 중반까지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사는 곳이었다.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저녁 9시에 끝나는 일정이라 육체적으로 고되긴 했다. 아침에 일어나 친구를 씻기고, 같이 밥 먹고, 오전 워크숍에 데리고 가서 함께 워크숍 활동하고, 점심 먹고 잠깐 쉬었다가 오후 워크숍 활동하고, 끝나고 집에 와서 저녁 먹고 씻기고 재우는 일을 일주일 동안 반복했다. 그래도 하루 반은 쉴 수 있었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막막함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함, 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훨씬 더 컸던 것 같다(웃음).
보통 시골 사람이 아니라 도시 사람이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것 같다. 레쎄남님에게 공동체 생활은 낯설지 않았나?
사실 나와 생판 모르는 사람과 살을 맞대면서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특별했던 경험이었다. 내가 맡은 학생과 관계도 굉장히 좋았고, 그 학생의 부모님 집에도 몇 번 초대를 받아 갔었다. 내가 이 공동체에서 사는 것에만 끝나지 않고, 관계 맺는 사람들이 점점 확장된다는 느낌, 서로서로 보살피고 아껴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 좋았다.
1년 가까이 있으면서 좋은 기억도 많았고, 나쁜 기억도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동체에서 만난 독일 자원봉사 학생들이었다. 한국의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수능이 끝나면 곧바로 대학에 가거나 아니면 생업에 뛰어들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닌데, 독일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 온 독일 친구들 상당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2년 휴식기를 가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고 했다. 본인이 의미 있는 일을 경험하고 싶어 자발적으로 외국에 나온 친구들을 보면서 신기했고, 한편으로 독일이라는 나라에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이랑 같이 지내면서 참 좋았다.
한국에 들어가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을 텐데, 싫지는 않았나?
그다음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교환학생으로 갔다(웃음). 스코틀랜드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일상도 살아보고 문화도 자연스럽게 접했으니, 이제는 학문적으로 뭔가를 배우고 싶었다. 물론 교환학생이다 보니 공부는 40만 하고 60은 놀기 바빴다(웃음). 그러면서 나 같은 파견 학생 말고 그 학교의 정식 학생들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다음번에 유럽으로 정식으로 공부하러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로테르담에 있으면서 좋았던 점은 자전거를 아주 많이 탔던 것이다. 교환학생은 학생 할인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차비는 너무 비싸 필연적으로 자전거를 타야 했다.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배타적인 정책이었지만 그래도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날이면 정말 너무 좋았다. 지금 사는 독일과 비교해도 네덜란드는 훨씬 더 쾌적하고 사람들이 여유가 넘치는 것 같다. 이방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훨씬 덜 하다고 느낀다. 처음 보자마자 “Where are you from?” 이란 질문을 잘 안 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개방적인 분위기가 참 좋았다.
그런 분위기는 또 한국과도 많이 다른 것이기도 하다.
한국에 돌아와 졸업 후 NGO, 준정부기관 등에서 인턴,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한국은 보수적인 위계질서가 당연시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별것도 아닌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눈치를 봤어야 했다. 아랫사람이면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한국 사회에서 미덕이라는 생각은 나도 어쩔 수 없게 만들어서 불만이 있어도 쉽게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싫어요”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고,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야겠다 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일했던 곳 중에서 어떤 곳은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환경을 중요시하는 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권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일하면서 아주 가끔 재미를 느끼긴 했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것이 아닌 잡무 담당이라 크게 보람차지는 않았다.
원래 레쎄남님의 꿈은 뭐였나?
예전에는 UN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게 내 꿈이라고 생각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려면 최소 석사학위가 필요한데, 유럽 대학에 정식으로 등록해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내 꿈을 이루기 위한 조건에도 부합해서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대학원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이루고자 한 대로 잘 풀리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사실 UN도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가 아닌 이상, 서류 처리 업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 세계 정부라고 하지만 국내 정치의 연장선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 즉, 한국 정치인이 아닌 이상, 혹은 한국 외교부에서 일하지 않은 이상 UN에서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독일에 오기 전에는 내 꿈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내 꿈이 아니라 주변에서 영향받은 꿈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나중에 10년, 20년 뒤에 나의 경험이 국제기구의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면 참여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제는 지금 당장 국제기구에 진출하는 게 나의 인생의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원 과정이 끝났을 때 그런 생각이 더욱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굉장히 목적 지향적으로 살았다. 이거 다음에 저걸 해야 하고, 저걸 끝내면 다른 무언가를 목표로 정했다. 그런데 목표를 향해 나아갈수록, 내가 갖고 있던 꿈이 나의 내면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주변의 영향을 받아서 키워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해졌을 때, 당황스럽고 허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떤 한 과정이 끝났을 때,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현실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된 건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독일에 남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한국에 돌아가도 나쁘지 않은데, 돌아간다고 해도 독일 생활에 익숙한 내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독일에서 어디든지 명확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이 없었고, 자신감도 점점 없어졌다. 한국에 나 말고도 고학력자가 넘치고, 독일에 남아 있다고 해서 내가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 능력이 어디에 쓸모가 있을 것인가. 같은 연구기관에서 프락티쿰(Praktikum, 인턴십)을 하고 비슷한 시기에 대학원을 졸업한 친구가 있었는데, 졸업하고 지원한 일자리에서 나는 안됐고 그 친구는 합격했다. 내 생각엔 언어 능력이 결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친구는 독일인은 아니지만, 독일어에 유창하고, 영어도 잘하고, 러시아어도 했다. 나에게 독일어는 엄청난 장벽이었다. 독일에 남아 있느냐, 한국에 가느냐는 두 가지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다가 어느 시점에 독일에 남아야 할 이유가 생겼고, 그래서 독일에 남기로 했다.
그 이유를 혹시 물어봐도 되나?
결정적으로는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파트너 때문에 독일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레쎄남님, 나 모두 꺄). 또 독일에서의 삶이 나한테 더 맞고 편해서 한국으로 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본인의 연애를 공개하기가 쉽지 않은 일 같은데.
오히려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큰 편이다. 처음 파트너를 사귀었을 때는 뽐내고 싶었다. SNS에 뭔가 암시하는 것을 많이 올리기도 하고 과감하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동성애자가 네 주위에 존재한다’라고 숨기지 않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제하는 편이다. 듣는 상대방이 불편하게 느낄 때도 있고, 특히 파트너가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여기서 차이를 발견했다. 내 성적 지향을 공개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엄청난 상처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이렇게 무식하게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믿었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내 행동이 경솔하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후로는 나대지 않고 있다. 그래도 언제든 편한 상대를 만나거나 만남의 분위기가 좋으면 굳이 감추지 않으려고 한다(웃음).
서로의 다름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나를 돌아보고, 내 행동을 조심하는 과정.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고, 나를 바꿔보는 과정이 힘들지 않았나? 나 같으면 많이 울었을 것 같다. 정말 레쎄남님 훌륭하다. 멋지다.
성격이 N극과 S극이다(웃음).
가까운 사람에게도 이야기했나?
파트너와 2015년 10월에 사귀기 시작했는데, 그해 12월에 한국에 가서 바로 이야기했다. 사실 가장 친한 친구는 잠깐 독일에 놀러 와서 내 기숙사에 한 달 정도 같이 있다가 돌아가서 이미 알고 있다. 엄마에게는 미리 편지를 썼는데,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라는 말에서 엄마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내가 오기 전에 내 친구를 만났다고 한다. “레쎄남이 이상한 것 같다."라는 엄마에게 친구가 “어머니, 레쎄남이 12월에 와서 이야기할 거에요.”라고 했다는데, 12월에 가서 내가 직접 이야기 꺼냈을 때 엄마는 또 한 번 쇼크를 받았다.
요즘 엄마와 아빠는 현실외면(웃음). 친한 친구들한테도 다 이야기했다. 독일에서 알게 된 대학원 동기들도 다 안다. 그런데 독일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에게는 조심스럽다. 독일인들에게는 마음이 편해지면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데,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게 잘 안 된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나를 볼까 봐 내키지 않는다. 일일이 다 설명해줘야 하고 고정관념을 깨주는 일이 귀찮고 때로는 짜증 나서 말을 안 하게 되더라.
지역 뉴스에도 관심이 많고, 투표 참여, 시위 참여 등 오래전부터 정치참여를 실천하고 있다. 언제부터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은 지역사회에서 정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아빠의 경우는 2011년 총선에도 나갔다. 물론 총선에 잡음이 많았고, 결국 당내에서 싸우다가 밀려났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알고 있던 민주당의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졌다. 우리 아빠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경선 과정이 너무 흙탕물이었고 공정하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때부터 약간의 정치 냉소주의가 생겼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심이 있고 더 알고 싶은 부분이 있었지만, 항상 흑백논리로 상황을 지켜봤던 것 같다. 새누리당은 나쁘고 민주당은 옳다는 식이었다. 민주화, 안보, 평화 같은 거대한 담론에서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는, '이렇게 가는 게 옳아, 이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 하는 생각만 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 민주당은 옳은 것을 하고, 새누리당은 못 하고 있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살았던 것 같다. 옳지 않았다(웃음).
특히 분노하면서 참여했던 정치사회 이슈가 있었을까?
대부분에 많이 분노했다(웃음). 특히 대학교 등록금. 왜 우리는 한 학기에 5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내고 다녀야 하나 등록금 반값 시위에 많이 나가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그런데 그때에도 ‘등록금 반값을 실행하려고 하는 당은 옳아, 그렇지 않은 당은 나빠’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4대 강도 그렇다. ‘4대 강 미쳤어? 왜 해?’라고 생각해서 4대 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나쁘고 4대 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야 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 정치를 옳고 그름으로 쉽게 평가하려는 전형적인 일반인 중 하나에 불과했었다.
레쎄남님 이야기에 많이 공감한다. 나도 그랬다. 주변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던 정치를 끊어내고, 자기만의 정치적 길을 가는,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나?
녹색당은 내가 처음으로 가입한 정당이다. 그전까지는 내 집안에서 절대적인 존재, 사회에 나갔을 때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제는 그 영향에서 벗어나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과 녹색당이 지향하는 방향이 맞닿아 있다고 느껴서 녹색당에 가입하게 됐다. 덧붙여 말하자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덕분에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됐다. 파트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고의 영역이 커졌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웠다. 해외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살면서 한국에서만 있었다면 전혀 못 했었을 소수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가지게 된 것도 있고, 파트너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도 있다.
나의 삶을 돌아보고 싶어서 지금까지 살았던 날들을 기억하면서 일기를 써본 적이 있는데, 그 중 주제가 ‘좋은 엄마, 나쁜 엄마’였다. 나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객관적으로 보고 싶기도 했다. 나와 엄마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되짚어 보고 싶었다. 말순 씨는 그녀의 교육열로 인해 내 삶에 많은 부분을 제재했던 분이다. 그래서 내가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항상 싸워서 얻어 내야 했다. 별것도 아니지만, 강아지를 기르고 싶거나, 댄스학원에 다니고 싶거나, 십 대 시절에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서 해보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말순 씨는 한 번에 오케이가 없었다. 나의 주장에 말순 씨가 토를 달면 자존심이 상해서 어떻게 해서든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하고자 노력했다. 만약 말순 씨가 나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더라면, 내가 조금 더 일찍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복합적인 감정이다. 지금의 내 파트너는 내가 무엇을 하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준다. 아무 말 없이 내 생각을, 나를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다. ‘공감’이란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파트너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것. 평생 못 경험해보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 다행이다. 축하한다!
하하하(웃음) 그러게 말이다. 글 쓰면서 엄마 부분에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엄마가 내 성적 지향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으신다. 지난주에 전화하면서 “언제 결혼할래?”라고 하길래 “짝은 있는데, 엄마 아빠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하니 잠시 침묵하고 다른 내용으로 넘어갔다.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면 좋을 텐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는 잘 맞았나?
주위에서 보면 부러워할 정도로 아빠와 사이가 좋았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아빠와 단둘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랬다. 독일에 와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소수자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아빠와 나 사이에 많은 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 역시, 한국 사회에서 주류로 살았던 사람이자, 가부장적인 사고방식과 권위 의식이 있는 대한민국 남성중의 한 사람임을 느꼈다.
부모님을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맞다.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 서로 싸우고 푸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텐데, 우리는 물리적인 공간도, 시간대도 완벽하게 다르다 보니 각자의 입장을 더욱 고수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힘들다.
남은 괜찮은데, 우리 가족은 안 돼 이런 식이다. 이 이중 잣대를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고 해서 그걸 포기하면 안 될 것 같다. 예를 들어서 나도 담배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상대방이 다 괜찮고 맘에 들어도 담배를 꺼내는 순간 눈 밖에 났다. 나만의 강박을 만들어 놓고 그게 아니면 내 사람으로 부적격하다는 평가 기준을 만들어 놨었다. 그런데 지금 내 파트너는 담배를 피운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왜 담배 피우는 사람을 싫어해? 담배가 건강에 안 좋기 때문이지. 그런데 나도 술 마시고 탄수화물 중독 수준이잖아. 나도 몸에 안 좋은 것들을 역대급으로 하고 있는데 왜 상대방을 구속하지? 사회의 통념 때문에 담배가 너의 기호를 무시하고 너를 구속하거나 강박적으로 행동할 순 없겠다. 다만 냄새는 정말 싫어.’ “담배 냄새가 싫으니까 피려면 밖에서 피워.”라는 말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만의 강박을 깨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부모님 세대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교육의 훈련이나 경험이 부족하기에 강박을 깨는 것이 특히 더 어려운 것 같다.
공감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의 덕목에 동의하지 않고, 우리의 삶은 다른 방식,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내가 밖에 속옷을 안 입는 것을 싫어하는 아버지와 어떻게 공존하며 살 것인가 고민이 들 때가 있다.
나도 속옷을 잘 착용하지 않는다. 되게 편하고 엄청 시원하다. 진짜로. 그런데 회사 나갈 때 블라우스만 입으면 티가 나서 신경은 좀 쓰인다. 가끔 운동할 때 스포츠 브래지어를 하긴 하지만, 이제는 일반 시중에 파는 브래지어는 못 입겠다. 숨이 막힌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에센에 사는 2명의 여성과 함께 ‘미수ㄹ다’ 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했다(http://www.podbbang.com/ch/15464). 뒤셀도르프 및 독일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에 갔다가 (술을 마시며) 함께 감상을 나누는 내용이다. 특히 즐거웠던 에피소드는?
우리 셋이서 친해지면서 ‘팟캐스트 하면 어떨까? 해보자!’라고 말한 지 거의 1년이 됐을 때 녹음을 시작했다. 참 즐거웠고 매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지만, 다시 들으면 너무 부끄럽다. 왜 이렇게 마이크만 켜면 말을 더듬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못 하겠는지... 편집 담당이 편집하다가 화를 많이 냈다(웃음). 중간중간 번외 편으로 독일 술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독일에 사는 팁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도 재밌었다.
일단 전시 보는 것이 재미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미술에 1도 모르는 관람자로서 직감적으로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한다면, 나머지 두 명은 미술과 관련한 전공을 공부하기에 내가 놓치거나 미처 몰랐던 부분을 설명해준다. 각자 전시를 보는 방식, 서로의 느낌을 공유하는 게 재밌었다. 술 마시면서 녹음하는 거라 취해서 헛소리도 많이 하고(웃음), 정말 즐거웠다. 녹음을 시작한 시기가 우리 각자가 굉장히 바쁜 시기여서 몰아서 녹음하곤 했다. 주말에 전시 다녀와서 평일에 녹음하고 편집하고 업로드하고, 또 주말에 전시 다녀오고. 이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서 술 마시고 이야기 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빡빡한 일정이 힘들긴 했지만, 의미 있었고, 참 좋은 경험이었다.
올 4월에 시즌 1이 끝났다. 각자의 사정으로 시즌을 끝냈지만 더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주말마다 전시 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독일에 있는 동안 하고 싶은 활동은?
‘미수ㄹ다’ 시즌 2도 시작하고 싶고, 페미니즘 관련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펭귄의 일기>를 시나리오로 만들어서 이것을 3분짜리 짧은 영상으로 제작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싶다. 일단 시나리오는 완성했는데 카메라 다룰 줄도 모르고 손기술도 없어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아이디어를 계속 구상하고 있다. 에피소드 하나를 완성해서 유튜브에 올리는 게 올해의 목표였다. 그런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 거취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되면서 진전을 못 시키고 있다. 이것 말고 또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내 전공을 살려서 하는 일이다. 기업이 지속 가능한 경영을 얼마만큼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내부 환경 감사 및 모니터링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기업보고서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첫 번째 대상은 애플과 삼성인데 두 기업의 기업보고서를 분석하는 일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고 있다. 애플과 삼성이 어떻게 경영을 해왔고, 환경적으로, 에너지 관리 측면에서, 인권 측면에서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지 분석하는 일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제품의 기업들이 이 제품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잘 알고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다. 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동영상으로 재밌게 만들어 보고 싶다.
녹색당 유럽 당원 모임에 함께 하게 된 계기는?
당원으로 가입하고, 당비를 내는 것 같은 조금 더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있었다. 지난 10월에 녹유 총회도 한번 갔다 오면서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됐고, 이제 그 생각을 실천한 거다. 내가 정치 활동을 다 할 수 없지만, 내가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레쎄남에게 녹색이란?
경계를 허무는 것. 인생에서 경계를 허무는 일은 녹색으로부터 시작했다. 성 정체성의 경계를 허물고 내가 개척한 곳으로 들어선 일. 사회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질문하고, 이상과 비 이상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 그런 게 나에게 녹색으로 느껴지더라. 앞으로도 나 스스로 계속 경계를 허무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인터뷰어 및 정리: 손어진(베를린)
*인터뷰 날짜: 2018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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