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돌아왔다. 몸은 많이 회복되었나?
아직도 완벽하게 회복되진 않았다. 매일 집에서 요양하면서 지낸다. 다들 수월하게 순례길을 걷는 것 같은데, 나는 왜 그렇게 불편하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산티아고를 걷는 게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것을 이뤘다는 게 내게 나름대로 의미가 됐고, 계획한 대로 완전한 순례를 이루지 못했다는 부분에선 역시 인생은 계획한 대로 안되는 거구나를 받아드리는 경험이었다. 중간에 자전거에 치이는 사고가 나서 몇 구간을 못 걸었다. 걸으려면 어떻게든 걸었겠지만, 사고 이후 조금 무섭고 빨리 그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정말 돌아가고 싶은 좌절감이 있었다. 그래서 100킬로 정도는 버스를 탔다. 나중에 할머니 되면 다시 와서 못걸었던 구간을 다시 걸으련다(웃음).
실애님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이 우리네 인생이랑 좀 닮았다. 오늘 오전(7월 23일)에는 노회찬 씨가 죽었다.
아직 충격이다. 인간적으로 너무 안타깝다. 새벽에 뉴스를 보고 친구들과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정치 이제 어찌할 건가.
충격의 도가니인 한국으로 곧 돌아간다.
빨리 가서 아귀찜 먹고 싶다(웃음).
2년 8개월 동안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친구가 됐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기억에 남는 사람을 꼽자면?
맘프(프랑크푸르트에서 일하던 펍)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 중에 철학 공부하는 친구가 있는데, 걔는 처음부터 끝까지 별로였다. 알고 보니까 내 룸메이트도 같은 생각이라더라.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웃음). 내가 외국인이라는 배려를 전혀 안 해줬다. 같이 일할 때 일을 못 한다고 소리 높여 화를 내곤 했다. 걔랑 일하는 날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또 프랑크푸르트에서 같이 살았던 식구들이 참 고맙다. 그중 한 명은 내년에 한국에 놀러 온다고 한다. 맘프 사장도 고맙고, 제일 처음 하이델베르크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선배 언니에게도 고맙다. 꼭 시상식 같다(웃음).
대학원 수업 중에 독일의 선진 사례들이 많이 제시되었고, 이것을 확인해보고 싶어서 독일에 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서른 전에 대한민국을 꼭 떠나 살아보고 싶었다. 20대 활동가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뭔가 바꿔보고 싶었다. 그게 가장 먼저였고, 대학원은 자극제였다. 다른 가능성을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성격상 똑같은 음식은 또 안 먹는다. 낮에 먹은 걸 저녁에 또 안 먹듯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도전하기 좋아하는 성격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에 오고 싶다는 생각은 나오기 삼 년 전부터 했다. 그때는 돈도 없고, 올 상황이 아니었는데, 서른 전에는 꼭 판을 바꿔보자고 해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도 서른 살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지 않나(웃음).
독일에서 실제로 살아보니 어떻던가?
나오길 잘했다. 독일이 꼭 좋아서라기보다는 사람이 낯선 환경에서 살아보는 게 정말 필요한 것 같다. 겸손해지고 한편으로 용기도 생긴다. 나중에 40대 즈음 주변 환경이 나에게 지리멸렬하게 느껴질 때 또다시 환경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문화도 다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이 우주에 나밖에 없구나 하는 우주적 고독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독일에 오기 전과 후, 스스로 바뀐 것 같은가?
사람들이 하나도 안 바뀌었다고 할 것 같긴 한데(웃음), 일단 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이 사는 사람들 중에 한 번 결혼해서 아들도 있고 이혼한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처음 우리 식구로 들어왔을 때 ‘어휴, 쟤는 어쩌다가 이혼해서 아들이랑도 헤어지고 여기로 온 거야’ 생각하며 한국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혼남이라는 이미지가 갖는 편견으로 그를 대했다. 그런데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와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면서 ‘인생이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산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되고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이제 이 안경을 써버렸기 때문에 한국에 가서도 이렇게 보게 될 것 같다. 사실 지금도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통화하면서도 내가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어떤 사건을 보는 것도 그렇고, 직업, 관계, 사람 모두를 포함해서 말이다.
20대 대부분 시간을 지역시민단체, 새벽이슬(기독교 선교단체로 사회 참여, 사회 선교를 강조함) 등에서 활동했다. 어떻게 신앙생활과 사회참여를 동시에 할 수 있었나?
2005년에서 2010년까지 학교에 다녔는데, 대학 때 새벽이슬을 한 건 1년밖에 안 된다. 4년은 학생회에 몸담았다. 맨날 집회나 데모에 다니고 단식투쟁도 하고 그랬다. 사실 스무 살 때 예수님을 만났는데, 당시 다녔던 교회는 이명박을 장로로 뽑는 굉장히 보수적인 교회였다. 주일마다 집회 갔다가 교회 가면 사람들이 왜 거기에 가느냐고 했다. 결국 그 교회를 나오긴 했지만, 초반 신앙생활을 집중적으로 해서 잘 자랐고, 그다음 만난 새벽이슬에서 계속 예배와 사회참여를 잘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이슬의 사회선교라는 모토가 나의 세계관과 잘 맞았다.
학생회 활동도 그렇고 이후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 같은 거 하는 것을 좋아했다(웃음). 그때는 반장이란 개념은 선생님한테도 이쁨받고 친구들한테도 인기 많은 그런 것이었는데, 대학 때는 교수들하고 싸워야 하더라. 그렇게 반대로 가야 되는지는 정말 몰랐다(웃음). 새내기 어느 날, 5월 축전 때였던 것 같다. 동기들과 고려대 근처로 밥을 먹으러 갔다가 펄럭이는 깃발 무리를 봤다. 심장이 막 두근두근하더라.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한텐 먼저 기숙사에 가라고 하고 나는 그 깃발 중에서 서울여대 깃발을 열심히 찾았다. 그랬더니 우리 학교 깃발이 조그맣게 펄럭이고 있더라. 그리로 가 “저도 서울여대생인데 같이 하면 안 돼요?” 하면서 그때부터 함께하게 된 것이다(웃음). 선배 언니들이 항상 나에게 “너는 네 발로 온 거니까 우리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고 했다. 선배들이 있던 동아리가 민중노래 율동패였는데, 마침 내가 춤추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정말 재미있게 활동했다.
그렇지만 부모님과의 갈등이 심했다. 엄마는 딸을 서울로 보내놨더니 얘가 예수쟁이가 되질 않나 맨날 집회에 다니질 않나 속상해하셨다. 명절마다 광주에 내려가기만 하면 싸웠다. 나는 나대로 ‘부모님이 왜 이런 정의로운 일을 이해하지 못하나, 이건 본인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인데, 내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 혈기 있던 때가 있었다(웃음).
원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사춘기 시절, 집안 상황이 어렵게 되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나는 수험생이라 이모 집에 얹혀 살고, 다른 가족들은 시골로 이사갔다. 그땐 부모님 원망밖에 안 한 것 같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독서실 가서 공부하고 싶은데 그것도 못 해준다고 하니까 그게 너무 슬펐고 원망스러웠다. 이것이 대학에 와서 또래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해소됐는데, 들어보니 그맘때 즈음 대부분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집이 어렵고 그랬다는 거다. 그때 머리를 띵 맞은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사회가 문제였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아빠가 피해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 사회구조와 외부세력에 관심을 두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 활동가의 삶을 살게 된 계기가 있는지?
자려고 누웠는데 눈물이 막 나더라. 막상 졸업할 때가 되니까 해 놓은 것도 없고 막막했다. 그 당시에는 어떤 단체에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다. 일단 학교에서 행정조교 일을 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맞는 재밌는 일을 찾아가야지 하던 중에 ‘마포 FM’이라는 라디오 방송국 편성팀에 들어가 PD로 일하게 됐다. 지역 사람들이 만든 지역 공동체 방송국이라 규모는 작지만, 그곳에서 지역 분들에게 미디어 교육도 하고, 그분들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지역전파로 타게 하는 일을 했다. 지적장애를 비롯한 장애를 가진 분들, 청소년들, 다문화 분들, 성 소수자 분들 등 거기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마포 FM에서 1년 반 정도 일하고 나왔지만, 이후로 독일 나오기 전까지 계속 방송국에 딸린 미디어 교육팀에서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했다. 시간 조정이 가능하고 시급도 나쁘지 않아서 새벽이슬 전임 간사를 하면서도 계속 일했다.
캠퍼스 선교단체 간사라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고 알고 있다.
처음에는 홍익대, 그다음에는 서울여대 간사로 일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듣고, 또 내 이야기를 하고, 조언하고 설득하는 일들은 적성에도 잘 맞고 즐거웠는데,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부담감이 있었다. 우리 단체는 예배 때 간사들끼리 돌아가면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설교 차례가 되면 머리를 싸매고 말씀을 준비해서 그걸 가지고 강단에 설 때 두려움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20대 중후반에 열심히 했던 신앙으로 평생을 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가끔 그때 외웠던 말씀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때 했던 세계평화, 통일을 위한 기도들이 지금 의미 있는 결과로 보일 때 굉장히 기분이 좋고, 감사하다. 새벽이슬이 사회선교단체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집회현장에 나가기도 하고 세미나도 자주 열었다. 돈은 안 되는 일이지만 뭘 많이 했다(웃음). 세월호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사람들과 노란 리본을 만들어서 홍대 입구에서 나눠주고 그랬다.
실애님을 보면 진짜 부지런하다. 이 정도 부지런은 해야 활동가라 할 만하다(웃음).
병이다(웃음). 그 병이 독일 와서 치료된 게 이 정도다. 딱 하나만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대학원 조교도 같이하고, 미디어 교육 강사도 계속하고, 시간을 쪼개서 돈을 벌면서 활동을 병행했다.
쉽지 않은 청년의 삶이 지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땐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 만나서 술 마신다. 아니다. 예배당 가서 기도한다(웃음). 솔직히 두 개를 다 했다. 진짜 힘들 때는 철야기도에 가서 울면서 무릎이 저리도록 기도하고, 어떨 때는 사람들 만나서 한잔 마시고 이야기하면서 풀면 또 괜찮아지더라. 내가 투쟁하고 사회참여하는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고, 그다음은 하나님이 해주시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해주시는 것에 앞서서 인간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될까 하는 고민으로 지금까지 신앙생활과 사회참여를 같이 해왔다. 그런데 그때는 속해있는 단체가 있어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속해 있는 단체가 없으니 상황이 또 다르다(웃음).
녹색당이 있지 않은가(웃음). 독일에서 녹색당 당원이 되었다.
독일에 오자마자 녹색평론 읽기 모임에 나갔다. 한국 소식들에 멀어지고 감각이 무뎌지지 않기 위해 나간 것인데, 그 모임을 하다가 몇 개월 뒤에 당원이 되었다. 2년여 동안 해온 녹평모임에 대한 애정, 그리고 거기에서 만난 당원들에 대한 애정은 확실히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녹색당에 대한 애정으로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다. 당비를 내고 당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나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건데, 녹색당이 나의 당이라고 느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가끔 내가 녹평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정의당 혹은 민주당 사람들이었다면 또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만 그 사람들이 녹색당 사람들이었고 나는 당원까지 됐다. 사실 한국에서도 관계 맺고 있는 사람 중에 녹색당원이 많다. 이제는 녹색으로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한다.
어떤 사람과 마음이 잘 통하고 함께 함이 좋은가?
생각이 열려있는 사람이 좋다. 자기만 맞다고 하는 사람 말고. 나더러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나는 ‘경계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독일에 와서 인종, 국적, 나이 불문하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마다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발견할 때 정말 재밌다. 맘프에서 일할 때 별의별 손님들을 만났고 단골들 중에는 나이 관계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이 내게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한국에 가면 꼭 예멘 분들을 만나러 제주에 가고 싶다. 돌아가서 또 나랑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이 다른 전쟁을 피해 온 사람들, 그분들을 만나 사정을 들어보고 싶다. 우리가 여기에서 비자청 하나만 가더라도 쫄리는 그 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그들의 심정을 공감하며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를 혹은 어떤 것을 깊이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가?
받은 사랑이 정말 많아서 사랑을 줘도 아깝지 않은 것 같다. 당연히 있다. 지금도 하고 있다(꺄아).
진실애에게 녹색이란?
지금도 밖을 봐도 녹색이 보인다. 공기 같은 것. 없으면 죽는 것이 녹색이다.
*인터뷰어 및 정리: 손어진(베를린)
*인터뷰 날짜: 2018년 7월 23일
*이미 한국에 돌아간 실애님, 마지막 독일에서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실애님의 가는 모든 삶의 여정을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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